발렌틴 고메스 파리아스(1781–1858)는 멕시코의 정치인으로, 과달라하라에서 의학을 전공하고 계몽주의 사상의 영향을 받았다. 그는 1833년 부통령으로 선출되어 가톨릭 교회와 군대를 겨냥한 급진적인 개혁을 추진했지만, 보수파의 반발과 산타 안나의 배신으로 실각했다. 이후 멕시코-미국 전쟁 중 두 번째 대통령으로 재임하며 교회 재산 국유화를 시도했으나 폴코 반란으로 물러났다. 말년에는 자유주의 정치 활동을 이어갔으며, 1857년 헌법 제정에 참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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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렌틴 고메스 파리아스는 1781년 2월 14일 당시 누에바에스파냐의 일부였던 할리스코 주 과달라하라에서 태어났다.[4] 그는 고향인 과달라하라에 있는 대학교에서 의학을 공부했다. 대학 시절 프랑스어를 익혔고, 당시 누에바에스파냐 사회에 퍼지고 있던 계몽주의 사상에 깊이 빠져 관련 서적들을 탐독했다. 그의 졸업 논문은 계몽주의 사상의 영향을 강하게 보여주어 멕시코 종교 재판소의 주목을 받기도 했으나, 별다른 법적 조치는 이루어지지 않았다. 이후 그는 과달라하라에서 의사로서 성공적인 경력을 쌓기 시작했다.
1817년 10월 17일, 그는 아구아스칼리엔테스에서 이사벨 로페스와 결혼했다.[5]
3. 멕시코 독립과 정치 입문
1821년 멕시코 독립 전쟁이 이구알라 계획을 통해 아구스틴 데 이투르비데의 주도로 성공하면서 멕시코는 군주국으로 새롭게 출발했다. 이때 헌법 제정을 위한 의회가 소집되었고, 고메스 파리아스도 의원으로 선출되었다. 초기에는 스페인 왕족에게 왕위를 제안했으나 거절당하자, 이투르비데 지지자들은 그를 황제로 추대할 것을 의회에 요구했다. 고메스 파리아스 역시 이 시기 이투르비데를 지지하며, 의회에서 그를 황제로 선출하는 것의 정당성을 옹호하는 연설을 하기도 했다. 결국 이투르비데는 멕시코 제1제국의 황제가 되었다. 자유주의자였던 고메스 파리아스는 이투르비데가 입헌 군주로서 역할을 하리라 기대했지만, 이투르비데는 점차 의회보다 자신이 우위에 있다고 여기며 독재적인 모습을 보였고 심지어 의회를 해산하기에 이르렀다. 이에 고메스 파리아스는 이투르비데를 강하게 비판하며 반대파로 돌아섰다.
1823년 멕시코 제국이 무너진 후, 고메스 파리아스는 멕시코 초대 대통령이 된 과달루페 빅토리아를 지지했다. 이후 자유주의 성향의 비센테 게레로 대통령 시기에는 로렌조 데 사발라가 재무장관직을 사임하자 그 후임으로 제안받았으나 이를 거절했다.
4. 첫 번째 대통령 재임 (1833-1834)
1833년 3월 선거에서 발렌틴 고메스 파리아스와 안토니오 로페스 데 산타 안나가 각각 부통령과 대통령으로 선출되었다. 두 사람은 직위를 공유하며 번갈아 대통령직을 수행하기로 했으나, 전임 대통령 마누엘 고메스 페드라사의 임기가 법적으로 끝나는 4월 1일에 산타 안나가 수도에 없었기 때문에 고메스 파리아스가 먼저 대통령 권한대행을 맡게 되었다.
이는 고메스 파리아스를 통해 가톨릭 교회와 군대를 겨냥한 급진적인 자유주의 개혁에 대한 여론을 떠보려는 산타 안나의 계산된 행동이라는 의심을 받기도 했다.
4. 1. 반성직자 정책과 개혁
로렌조 데 자발라, 멕시코주 주지사이자, 후일 고메스 파리아스 1차 집권 당시 프랑스 주재 외무장관.
고메스 파리아스가 권력을 잡으면서 언론은 점차 반성직자적 성향을 띠기 시작했다. 성직자들은 세속적이고 탐욕스러운 위선자로 비난받았으며, 성경은 무지한 시대의 터무니없는 거짓으로 가득 차 있다고 공격받았다. 교황의 권위 또한 공격 대상이 되었다. 진보주의자들은 멕시코의 독립이 스페인뿐만 아니라 교황으로부터의 독립이라고 선언하며, 성직자들이 외세에 복종한다고 비판했다. 가톨릭 사제들은 아즈텍의 우이칠로포치틀리(인간 제물을 받았던 신) 사제, 바리새인, 귀족 등으로 모욕당했다. 반성직자 작가들은 자신들의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해 프랑스 혁명 의회의 연설을 인용하기도 했다.
사제들은 정부의 감시를 받게 되었다. 미겔 라모스 아리스페 장관은 교황 칙서 및 기타 교황의 포고령이 정부의 승인 없이는 멕시코에서 발행될 수 없다고 선언했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1833년 성주간 동안 국회가 휴회하지 않도록 하는 제안이 있었으나, 통과되지는 못했다.
당시 로렌조 데 자발라가 주지사로 있던 멕시코주는 십일조 납부의 법적 의무를 폐지했다. 베라크루스 의회와 다른 주 의회들도 종교 공동체의 재산을 몰수하는 법령을 통과시켰고, 베라크루스 주는 모든 수도원을 폐쇄하기에 이르렀다. 이는 정부가 모든 종교를 탄압하려 한다는 우려를 낳았고, 고메스 파리아스는 그러한 의도가 없다는 해명 메시지를 발표해야 했다.
1833년 10월 27일, 전국적으로 십일조 납부의 법적 의무를 폐지하는 조치가 통과되었다. 하원 위원회는 모든 교회 재산을 국유화할 것을 권고했지만, 이는 법으로 제정되지는 못했다. 1833년 11월 6일에는 수도원 서약을 이행할 법적 의무가 폐지되었으며, 1833년 12월 17일에는 멕시코 정부가 교회 고위직을 임명할 권한, 즉 "파트로나토 레알"을 갖는다는 조치가 통과되었다. 이 조치에 따라 정부 승인 없이 이루어진 이전의 임명은 무효로 선언되었다.
개혁가들은 십일조 납부 의무 폐지로 교회가 재정적 어려움을 겪을 것으로 예상했지만, 대부분의 신자들은 계속해서 십일조를 납부했다. 마찬가지로, 법적으로 수도원을 떠날 수 있게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의 수도사와 수녀들은 공동체에 남았다.
1833년 10월에는 성직자들의 교육 활동이 금지되었고, 교회가 운영한다는 이유로 멕시코 대학교가 폐쇄되었다. 대학교의 예배당은 양조장으로 개조되기도 했다. 1834년에는 반성직자 운동이 더욱 거세졌다. 종교 축제와 관련 행사가 전국적으로 금지되었고, 성직자들은 정부 허가 없이 형제회를 조직하는 것이 금지되었다. 일부 지역에서는 수도원과 교회가 압수되었으며, 일부 교회는 극장으로 용도가 변경되었다.
4. 2. 보수파 탄압과 반발
고메스 파리아스가 처음으로 정권을 잡았을 때, 아나스타시오 부스타만테 전 행정부의 각료들은 대부분 잠적했으며, 전 재무부 장관이었던 라파엘 망기노 이 멘디빌만이 예외였다. 부스타만테 행정부 인사들을 심판하기 위한 재판소가 설치되었다.
1833년 6월 23일, 전국적으로 봉기가 발생하는 상황 속에서 의회는 소위 사건의 법(Ley del Caso|es)을 통과시켰다. 이 법은 정부의 적으로 간주된 51명에 대한 체포와 6년간의 추방을 승인하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추방 대상에는 전 대통령 부스타만테를 비롯하여 다음과 같은 인물들이 포함되었다.
추방 대상자 중 한 명인 미겔 산타 마리아는 정부가 정치적 반대자들로 감옥을 채우고 있다고 비판하는 내용의 소책자를 발행하기도 했다.[6] 고메스 파리아스 본인은 야당에 대해 더 온건한 접근을 원했으며 정치범에 대한 사형에도 반대했으나, 그의 의사와는 달리 '사건의 법'은 의회에서 통과되었다.
또한, 고메스 파리아스 정부는 군대 내에서 불필요하다고 여겨지는 장군들을 숙청하기 시작했다.[6] 이는 이미 고메스 페드라자 행정부 시절부터 시작된 조치였으나, 숙청 과정이 임의적이라는 비판을 받으며 군 내부에서 정부에 대한 반감을 키우는 결과를 낳았다.
4. 3. 반란과 실각
산타 안나는 고메스 파리아스와 함께 자유주의자로 선출되었지만, 나중에는 그를 배신하고 보수 반란을 지지했다.
고메스 파리아스의 급진적인 개혁 정책은 곧 반발에 부딪혔다. 1833년 5월 26일, 모렐리아에서 이그나시오 에스칼라다 대령이 정부에 반기를 들고 산타 안나에게 고메스 파리아스를 몰아내는 데 동참할 것을 요청했다. 그러나 당시 산타 안나는 이를 거부하고 오히려 전국 각지에서 일어나는 다른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나섰다. 에스칼라다는 발렌시아 장군에게 패배했다.
하지만 상황은 복잡하게 흘러갔다. 6월 6일, 산타 안나가 이끌던 부대 일부가 수치(Xuchi)에서 반란을 일으켜 그를 야우테펙으로 끌고 갔다. 반란군은 산타 안나를 독재자로 추대하고 자신들의 편에 서기를 원했다. 이 반란의 여파는 수도 멕시코 시티까지 번져, 6월 7일에는 일부 군인과 경찰이 국립 궁전을 공격했으나 진압되었다.
이에 고메스 파리아스는 6천 명의 병력을 동원하고 수도에 계엄령을 선포하는 한편, 산타 안나의 탈출을 돕는 이에게 포상금을 내걸었다. 수도에서의 반란 시도가 실패했음을 알게 된 산타 안나는 반란군으로부터 탈출하여 정부 측으로 복귀했다.
정부군에 복귀한 산타 안나는 7월 10일, 2,400명의 병력과 6문의 포를 이끌고 수도를 떠나 반란 진압에 나섰다. 그는 자신을 반란군에 끌어들이려 했던 마리아노 아리스타 장군을 구아나후아토로 몰아냈고, 아리스타는 10월 8일에 항복했다. 이로써 국가는 잠시 안정을 되찾는 듯했다.
그러나 고메스 파리아스의 개혁, 특히 반성직자 정책에 대한 불만은 계속 커져갔다. 산타 안나는 이전에도 고메스 파리아스를 축출하자는 제안을 여러 차례 거절했지만, 1834년에 이르러 상황이 달라졌다. 반성직자 운동에 대한 반발이 전국적으로 거세지고, 망가 델 클라보(Manga de Clavo)에 있는 그의 사저에는 고메스 파리아스와 의회의 개혁을 중단시켜 달라는 탄원이 쇄도했다. 또한, 고메스 파리아스를 지지하던 진보 세력 내에서도 분열이 끊이지 않았다. 결국 산타 안나는 1834년 4월, 입장을 바꿔 고메스 파리아스를 축출하기로 결정했다.
산타 안나는 의회를 해산시키고, 고메스 파리아스 행정부의 주요 개혁 조치였던 ''보호령''(Ley del Caso|레이 델 카소es)을 무효화했다. 숨어 지내던 주교들은 다시 교구로 돌아왔고, 부스타만테 행정부 인사들을 심판하던 재판소는 폐지되었다. 멕시코 국립대학교는 복원되었으며, 추방되었던 인사들의 귀국도 허용되었다. 이로써 고메스 파리아스의 첫 번째 집권기는 막을 내렸다.
5. 대통령직 사이의 생애 (1834-1846)
고메스 파리아스는 멕시코를 떠나 뉴올리언스로 이주하여 저축한 돈으로 생활했다. 그는 1838년에 귀국했으며, 베라크루스에서 지지자들의 환영을 받았다. 수도에 들어섰을 때 일부 시민들은 옛 대통령에게 환호를 보냈다. 고메스 파리아스는 합법적으로 국내에 체류할 수 있었지만, 그가 받은 환호에 대해 알게 된 각료 회의는 그를 감시하기로 결정했다.
고메스 파리아스는 1832년에 자신이 축출하는 데 일조했던 아나스타시오 부스타만테 대통령을 만나 정부를 존중하겠다고 약속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부는 그를 반역 혐의로 체포했고, 고메스 파리아스는 판사에게 자신의 집에서 정치 회의를 열었다고 인정했다. 그러나 파리아스는 부스타만테의 단명한 내각 중 연방주의에 공감하는 인사들 덕분에 곧 석방되었다.
5. 1. 1840년 연방주의 혁명
고메스 파리아스가 참여한 1840년 연방주의 반란으로 국립 궁전이 입은 피해
1840년 7월 15일, 이전에 부스타만테 대통령 전복을 시도했던 연방주의 장군 호세 데 우레아가 투옥 중 탈출하여 새로운 반란을 일으켰다. 우레아는 수백 명의 병력을 이끌고 국립 궁전을 급습하여 경비 병력을 제압하고 잠들어 있던 부스타만테 대통령을 침실에서 사로잡았다. 대통령은 반군의 포로가 되었으나 신변은 보장받았다. 한편, 전쟁 장관 알몬테는 궁전을 탈출하여 정부군을 규합하려 했다.
반란군은 발렌틴 고메스 파리아스에게 혁명의 지휘를 제안했고, 그는 이를 수락했다. 수도 멕시코 시티에서는 정부군과 연방주의 반란군 사이에 전투가 벌어졌다. 반란군은 국립 궁전 주변 지역을 장악했고, 정부군은 이를 탈환하기 위해 공격 준비를 갖추었다. 양측은 산발적인 교전을 벌였으며, 때로는 포격전도 벌어졌다. 포탄이 포로로 잡힌 부스타만테 대통령이 식사하던 방을 관통하기도 했다.
분쟁이 교착 상태에 빠지자, 협상을 위해 부스타만테 대통령이 석방되었다. 그러나 협상은 결렬되었고, 수도는 12일 동안 치열한 시가전에 휩싸였다. 이 전투로 인해 많은 재산 피해와 민간인 사상자가 발생했으며, 수많은 시민이 도시를 떠나 피난길에 올랐다.
이때 안토니오 로페스 데 산타 안나가 이끄는 정부 지원군이 수도로 향하고 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장기적인 내전으로 수도가 완전히 파괴될 것을 우려한 양측은 다시 협상에 나섰다. 결국 휴전과 반란군에 대한 사면에 합의하면서 연방주의 혁명은 실패로 막을 내렸다.
6. 멕시코-미국 전쟁과 두 번째 대통령 재임 (1846-1847)
산타 안나가 실각한 후, 고메스 파리아스는 은신 생활을 끝내고 1845년 멕시코로 돌아왔다. 그는 에레라 대통령에 의해 상원의원으로 임명되었으나, 텍사스를 되찾으려는 노력을 포기하려는 에레라의 정책에는 반대하는 입장을 보였다. 이후 마리아노 파레데스가 에레라를 축출했지만, 고메스 파리아스는 파레데스 행정부 참여를 거부했다.
멕시코-미국 전쟁이 발발하자, 고메스 파리아스는 국가적 위기 상황에서 멕시코를 통합할 인물로 과거의 정적이었던 산타 안나가 필요하다고 판단하고 그의 복귀를 지지했다. 호세 마리아노 살라스의 임시 정부에서 잠시 재무부 장관을 맡기도 했는데, 그는 내부 관세 폐지, 권위주의적 법률 개혁, 그리고 모든 멕시코인의 단결을 바탕으로 전쟁을 지속한다는 조건 하에 직책을 수락했다. 그가 재무장관으로 재임하는 동안, 산타 안나는 1824년 헌법을 든 고메스 파리아스와 함께 마차를 타고 수도로 돌아왔다.
1846년 12월, 산타 안나와 고메스 파리아스는 1833년과 마찬가지로 각각 대통령과 부통령으로 선출되었다. 당시처럼 산타 안나가 군대를 지휘하기 위해 자리를 비우면서 고메스 파리아스가 대통령직을 대행하게 되었다. 대통령직을 맡은 고메스 파리아스는 모든 멕시코 영토에서 미군을 몰아낼 때까지 전쟁을 계속하겠다고 선언했다. 그러나 안정적인 내각을 구성하는 데 어려움을 겪었으며, 1846년 12월에는 유카탄이 다시 독립을 선언하고 전쟁 참여를 거부하는 문제에 직면했다. 유카탄 선박들은 미 해군의 나포를 피하기 위해 자체 국기를 게양하기 시작했다.
6. 1. 교회 재산 국유화와 폴코 반란
''멕시코-미국 전쟁 당시 발렌틴 고메스 파리아스 내각 각료들.''
멕시코-미국 전쟁 중 정부는 전쟁 자금 조달에 어려움을 겪고 있었는데, 이는 재무부의 부패로 더욱 악화되었으며, 정부가 재산 소유주에 대한 감사를 제안했을 때 신뢰를 얻지 못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1847년 1월 7일, 재무부 위원회 위원 5명 중 4명이 서명한 조치가 의회에 제출되어, 교회 토지를 국유화한 다음 매각하여 1500만멕시코 페소를 교회로부터 압수하는 것을 승인했다. 이는 다시 고메스 파리아스의 반대자들이 그가 1833년의 반성직자 운동을 되살리려는 것이라고 두려워하게 만들었다.
이 법령은 의회 의장 페드로 마리아 데 아나야가 서명했으며, 고메스 파리아스는 재무 장관 주비에타의 지지를 받아 이를 승인했다. 후자는 어떤 사기나 재산 은닉도 피하여 이 조치의 효능을 저해하지 않도록 지시받았다. 교회 토지 임차인은 교회가 아닌 정부 요원에게 임대료를 지불하지 않으면 벌금을 부과받게 되었다. 외무부 장관 호세 페르난도 라미레스는 교회 내 정치적 동요를 예상하여 관련 인도 법률의 적용을 권고했다. 전쟁부 장관 발렌틴 카날리소는 공공 질서를 어지럽히는 자들에 대한 법률을 집행하는 데 최대한의 엄격함을 촉구했다.
이 법령에 대한 지역 반대가 더욱 두드러졌다. 케레타로, 푸에블라, 과나후아토의 입법부는 의회에 법령 무효를 청원했고, 두랑고 주는 이를 시행하지 않았으며, 케레타로 주는 전쟁 자금 조달을 위한 대체 계획을 제안했다. 교회 토지에 거주하는 임차인들 또한 법령 시행에 저항했다.
자유주의 신문 ''El Monitor Republicano''는 자금 조달을 위한 모든 가능한 선택 사항이 있는 가운데 정부가 전쟁 중에 공론을 수렴하지 않고 교회 토지를 국유화하기로 결정한 것에 대해 믿을 수 없다는 반응을 보였으며, 독자들에게 고메스 파리아스가 1833년에 교회 토지를 국유화하려 했을 때 자유주의 정부가 전복되는 것으로 끝났음을 상기시켰다.
외무부 장관 라미레스는 내각과의 갈등, 특히 교회 토지 구매자를 찾는 데 어려움을 겪은 후 사임했다. 1월 26일, 고메스 파리아스 대통령은 교회 토지 매각을 수행할 위원회를 임명했다. 법무 비서관 쿠에바스와 멘데스는 참여를 원치 않아 벌금을 부과받았다. 일반적인 부패를 줄이기 위해 재무부에 대한 감사가 실시되었고, 관련 공무원들은 교회 토지 매각의 진행 상황에 대해 4일마다 보고서를 제출하고 지연을 야기하는 요인을 설명해야 했다.
1월 15일 이른 시기부터 수도 멕시코 시티에서 시위가 벌어졌지만 정부는 교회 토지 국유화 정책을 고수했다. 2월 21일, 오아하카 주둔군은 정부에 반대하는 입장을 표명했다. 마사틀란도 뒤따랐고, 고메스 파리아스의 첫 번째 대통령 재임 기간에 반란이 일어났을 때와 마찬가지로, 반군은 고메스 파리아스와 권력을 나누고 있던 산타 안나에게 정부를 장악하라고 요구하기 시작했다.
한편, 국유화 법에 대한 평화적인 반대는 계속되었다. 자유주의 하원 의원 마리아노 오테로는 이 조치에 반대했고, 새로운 재무 장관 호세 루이스 후이시는 서명을 거부했다.
=== 폴코 반란 ===
새로 결성된 수도의 국민 방위대 구성원들이 정부에 우호적이지 않다는 것을 감지한 발렌틴 고메스 파리아스는 그들을 정부에 위협이 되지 않는 곳으로 이동시키려 했다. 그는 국립 궁전 옆에 위치한 대학교에서 독립 대대를 이동시키려 했다. 그는 2월 24일, 자신의 아들이 이끄는 군대를 보내 독립 대대를 임시 막사에서 내쫓았다. 독립 대대는 중산층 전문직 종사자들로 구성된 민병대였으며, 그들이 도시에서 추방당하면 가족들의 생계가 위협받았다. 이로 인해 항의와 분노가 일어났고, 이어서 독립 대대 구성원들이 체포되었다.
2월 27일, 여러 국민 방위대 대대가 정부에 반기를 들었다. 그들은 정부가 전쟁 노력에서 국가를 통합하는 대신 분열적인 정책을 추구하고, 국민적 합의를 바탕으로 군 자금을 조달하는 방안을 모색하지 않는다고 비난하는 선언문을 발표했다. 이는 '폴코 반란'으로 알려지게 되었는데, 수도 전역에 주둔한 민병대를 구성한 젊은 중산층 남성들이 폴카를 추는 것으로 유명했기 때문이다. 반군에는 이미 마리아노 파레데스 대통령을 전복시키는 데 역할을 했던 호세 마리아노 살라스 장군이 합류했다. 반군의 수장인 마티아스 데 라 페냐 바라간 장군은 2월 28일 발렌틴 카날리소와 만나 합의에 관해 협상했으며, 페냐는 고메스 파리아스의 퇴위를 주장했다. 협상이 실패하고 반란이 계속되었다.
한편, 산타 안나가 2월 22일부터 23일까지 벌어진 부에나 비스타 전투에서 승리했다는 소식이 전해졌는데, 실제로는 무승부였다. 산타 안나는 베라크루스에 상륙한 윈필드 스콧의 군대에 대항하여 방어를 준비하기 위해 멕시코 시티로 돌아가고 있었다. 그는 앙고스투라에서 산 루이스 포토시로 가는 길에 있는 마테우알라 마을에 있었는데, 발렌틴 고메스 파리아스 정부에 대한 혁명이 일어났다는 소식을 들었다.
3월 10일 산 루이스 포토시에 도착한 그는 고메스 파리아스와 페냐 바라간에게 각각 편지를 써서 적대 행위를 중단하라고 명령했고, 그들은 산타 안나의 도착과 중재를 기다리며 그렇게 했다. 수도로 가는 길에 그는 양측의 대표들을 만나 그들을 자신의 대의에 설득하려 했다. 3월 21일, 마리아노 오테로, 호세 마리아 라프라구아 등을 포함한 헌법 의회 대표들은 산타 안나에게 대통령직을 맡아달라는 제안을 하러 나섰다. 그는 다양한 이해 관계자들의 대표들을 계속 접견했으며, 부에나 비스타에서의 '승리'에 대한 축하를 받았다. 이그나시오 트리게로스는 새로운 연방 지구 주지사로, 페드로 마리아 데 아나야는 새로운 사령관으로 임명되었다. 이로써 발렌틴 고메스 파리아스는 다시 한번 실각했다.
7. 말년 (1847-1858)
노년의 고메스 파리아스 사진
고메스 파리아스는 사임 후에도 국회의원으로 활동하며 정치 활동을 이어갔다. 특히 미국-멕시코 전쟁 이후 미국과의 타협을 모색하는 세력에 맞서 반대 입장을 분명히 했다.
1850년에는 신문 El Tribuno|엘 트리부노es에 의해 대통령 후보로 지명되었고, 멕시코 시의 아윤타미엔토(Ayuntamiento, 시의회)에서도 자유주의 후보로 나섰다. 1852년에는 과거의 동료이자 정적이었던 산타 안나가 다시 독재 정권을 세우는 것을 지켜봐야 했지만, 1855년 자유주의 진영의 아유틀라 계획이 성공하며 산타 안나 정권이 무너지는 것도 목격했다.
아유틀라 계획이 성공한 후, 1855년 10월 4일 쿠에르나바카로 가서 그 도시 극장에 마련된 대표자 회의에 참여했다. 그는 이 회의에서 의장으로 선출되었으며, 급진파 멜초르 오캄포가 부통령으로, 훗날 멕시코 대통령이 되는 베니토 후아레스가 비서 중 한 명으로 함께 했다. 후안 알바레스 대통령 정부에서는 우체국 관리자로 임명되기도 했다.
이후 할리스코주 대표로서 1857년 헌법을 제정하는 제헌 의회에 참여했다. 이 헌법에는 그가 1833년부터 주장해 온 자유주의적 이상과 반(反)성직자주의 개혁 내용이 담겼다. 1857년 2월 5일, 그는 새로운 헌법에 충성을 맹세한 첫 번째 대표가 되었다.
고메스 파리아스는 개혁 전쟁이 발발한 지 몇 달 뒤인 1858년 7월 5일에 사망했다. 그의 장례식에는 당시 미국 공사였던 존 포사이스 주니어도 참석했으며, 유해는 믹스코아크에 안장되었다.
참조
[1]
웹사이트
Verba Iuris - la palabra del Derecho
http://www.cem.itesm[...]
2023-08-01
[2]
웹사이트
¿Por qué México no tiene vicepresidente?
https://www.milenio.[...]
2021-04-06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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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r qué en México no hay un vicepresidente del Gobierno?
https://mexico.as.co[...]
2021-11-21
[4]
논문
[5]
논문
[6]
서적
Mexico Desde 1808 Hasta 1867 Tomo II
Perez Dubrull
18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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